대구·경북 서양의술의 출발
대구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893년 4월이다.
미국 북장로교 소속 베어드 선교사(William B. Baird, 1862~1931)가 서경조 전도사와 함께 경상도 북부를 전도여행하면서 영남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이듬해 다시 대구를 찾은 베어드 선교사 일행은 대구가 선교의 전략적 기지로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 약전골목에 남문안교회(현 제일교회)를 창립했다. 한편 이즈음 대구지방에 ‘미국약방’이란 이름으로 의료선교를 펼치던 존슨 선교사(Dr. Woodbridge O. Johnson, 1869~1951)는 1899년 제일교회 구내에 ‘제중원(濟衆院)’이란 간판을 내걸고 진료활동을 시작했다. 이 약방과 제중원이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의 효시이다. 제중원으로 설립된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은 명실공히 대구 근대 의료사의 시작이었으며, 의료 외에도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제중원 초대원장, 존슨 선교사
제중원을 시작한 존슨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대구의 첫 의료선교사이다. 한국이름은 장인차(張仁車), 장의사, 장오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존슨 선교사는 1899년부터 1910년까지 제중원의 초대 병원장을 맡았다. 존슨 선교사에게 치료를 받은 환자들 중에는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날로 늘어갔다. 스님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최초의 안과수술을 받은 환자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으며, 소문난 절도범이 복음을 받아들이며 이 지역에 복음의 씨앗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존슨 선교사는 1909년 6월 27일 제왕절개 수술에 성공해 아기와 엄마의 생명을 살렸는데, 이 수술로 존슨 선교사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더구나 존슨이 나병을 치료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병원에는 많은 나환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존슨은 한옥 한 채를 나환자 요양소로 사용하면서 낮은 자들에게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했다.
존슨 선교사는 1908년과 1909년 사이 제중원에 근무하는 청년들 중 7명을 선발하여 현대의학을 가르쳤는데, 이는 대구 초유의 사실이며 현대 의학사에 중요하게 기록되고 있다. 또한 존슨 선교사가 미국에서 주문해 사택 뒤뜰에 심었던 대구최초의 사과나무는 그 자손목이 유일하게 남아 동산의료원에서 자라고 있다. 대구를 사과의 고장으로 만든 이 사과나무는 대구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되었다.
미국약방과 제중원
존슨 선교사는 성탄절이며 주일날인 1897년 12월 25일 조랑말을 타고 대구 남문 안에 들어왔다. 그는 2년 뒤 1899년 대구의 첫 교회인 남문안 예배당(현 제일교회) 옆에 하인들이 쓰던 작은 초가집을 고쳐 ‘미국약방’이라는 간판을 달았고, 약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구의 첫 근대의료사업의 시작이었다. 미국에 주문한 약품이 들어오고 본격적인 진료활동을 하면서부터 ‘제중원(濟衆院)ʼ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제중원은 작은 진찰실과 방보다 더 작은 창고, 큰방으로 삼등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큰방은 다시 약제실과 수술실로 양분되어 있었다. 제중원을 개원한 후 다음해 여름까지 1,700명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이들 중 신환자가 800명, 수술환자 50명, 왕진환자가 80명이었다. 1901년과 1902년 사이 치료 환자 수는 2,000명을 기록했다. 제중원이 문을 연 당시는 서구열강과 일본 제국의 식민지정책이 나라의 주권을 위협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나병 환자가 속출했으며, 결핵, 말라리아, 기생충이 성행하는 의료의 황무지기도 했다. 제중원은 나환자 구제사업과 풍토병 치료, 천연두 예방접종, 사회보건 계몽을 통하여 우리 민족이 겪는 고난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끊임없이 성장 발전했다.
열악한 환경의 제중원
제중원은 약 7m 높이의 대구 읍성의 축대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통풍이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천장이 낮고 좁아서 여름에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실내 온도가 올라가는 등 의사들이 건강에 위험을 느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존슨 선교사는 “비좁고 갑갑해서 여름에는 의사가 자기 건강의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는 곳”이라고 토로했다. 선교사들은 당시 불편을 ‘3S’로 표현하였다.
첫째는 냄새(Smell)이다. 대구는 앞산의 큰 골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달서천이 되어 계산동, 동산동 쪽으로 흘러들었는데, 여름 장마 때만 되면 해마다 수해를 입었다. 상류에서 떠내려 온 수많은 쓰레기들이 선교관 앞을 흐르는 달서천에 넘쳐났는데, 그 냄새가 얼마나 고약했던지 선교사들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둘째는 연기(Smoke)이다. 당시만 해도 모든 집이 나무를 연료로 해서 밥을 지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면 대구 읍성으로 둘러싸인 남문 안 선교기지는 말 그대로 연기골목이 되었다. 이 역시 선교사들의 문화와 생소해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셋째는 소리(Sound)이다. 선교사들은 밤마다 짓는 개소리, 부인네들의 다듬이 소리, 특히 무당 굿하는 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지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존슨 선교사는 1906년 제중원을 현재 위치인 동산동으로 옮겼다. 그 후 1911년 취임한 2대 병원장 플레쳐 의료선교사 때부터 제중원은 동산의료원으로 불리게 된다. 동산의료원은 일제강점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종합병원으로 성장했고 몰려드는 환자를 위해 진단과 치료의 과학화를 선도했다. 또한 영아를 위한 복지사업과 함께 1924년 간호부 양성소도 설립했는데, 간호부 양성소는 현재 계명대학교 간호대학으로 성장해 한국 간호교육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동산의료원은 6.25전쟁 이후 한국최초로 아동병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무료로 치료해 주는 등 어느 의료기관보다 무료진료를 많이 실시했으며,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들었던 약을 처방해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7대 병원장 마펫 의료선교사는 46년을 재직하며 병원 시설을 신축·확장하고 현대식 의료장비를 도입하는 등 동산의료원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실제로 1960~70년대 동산의료원의 의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1980년 지역 대표적 기독교 사학기관인 계명대학교와 병합하면서 의과대학을 세우고, 1982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거듭났다. 진료와 선교를 넘어 교육과 연구까지 병행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계명대 동산의료원은 새로운 100년을 향해 지상20층, 지하5층 규모(병상 1,041개)의 새 병원을 건립했다. 존스홉킨스대 병원 등 세계적 수준의 미국 병원 8곳을 모델로 하여 ‘환자 최우선’으로 건축 되었으며, 2019년 4월 15일 완공된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은 친환경 건물 인증(LEED),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시스템을 구축해 메디시티 대구를 대표하는 의료기관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